𝙇𝘼𝙓 𝙒𝙄𝙆𝙄
최근 변경
최근 토론
임의 문서
도구
최근 변경
몽고메리 K. 번즈
(r7 RAW)
[[분류:루이나]][[분류:루이나의 정치인]][[분류:루이나의 노동운동가]] ||<-2><height=80><tablewidth=450><tablealign=right><tablebordercolor=#8C1A1A><tablebgcolor=#fff,#1c1d1f><colbgcolor=#8C1A1A><colcolor=#F2E3C6> '''{{{-1 초대 [[루이나 사회민주당]] 당수}}}[br]{{{+2 몽고메리 킬라한 번즈}}}[br]{{{-1 Montgomery Kellaghan Burns}}}''' || ||<-2><bgcolor=#fff,#1c1d1f><height=200> [[파일:(인물) mkburns.jpg|width=100%]] || ||<width=30%><height=35> '''출생''' ||1869년 3월 4일[br][[루이나]] [[포트메이슨]] 록크로프트 || ||<height=35> '''사망''' ||1937년 11월 2일 {{{-2 (향년 68세)}}}[br][[루이나]] [[빈덴브루크]] || ||<height=35> '''묘소''' ||빈덴브루크 로즈힐 묘지 || ||<height=35> '''국적''' ||[[루이나]] || ||<height=35> '''별칭''' ||폭동의 왕[br]철로 위의 설교자 || ||<height=35> '''서명''' ||[[파일:(인물) mkburns_sign.svg|width=55%]] || ||<-2><^|1><height=32> {{{#!wiki style="margin:0 -10px -5px" {{{#!folding [ 펼치기 · 접기 ] {{{#!wiki style="margin:-6px -2px -11px" ||<width=30%><height=35><tablewidth=100%><tablebgcolor=#FFF,#1C1D1F><tablecolor=#212529,#E0E0E0><colbgcolor=#8C1A1A><colcolor=#F2E3C6> '''부모''' ||아버지 패트릭 번즈[br]어머니 엘리자 번즈 || ||<height=35> '''형제자매''' ||남동생 아서 번즈 || ||<height=35> '''배우자''' ||캐서린 도런 {{{-2 (1897년 결혼)}}} || ||<height=35> '''학력''' ||포트메이슨 공립학교 {{{-2 (중퇴)}}} || ||<height=35> '''소속 정당''' ||[[루이나 사회민주당]] || ||<height=35> '''지역구''' ||빈덴브루크 제2선거구 || || '''경력''' ||빈덴브루크 중앙철도 청소부[br]기관차 화부[br][[화부 조합]] 포트메이슨 지부 서기[br]화부 조합 기관지 부편집장[br]화부 조합 사무총장[br]초대 [[루이나 철도노동자연맹]] 위원장[br]초대 [[루이나 사회민주당]] 당수[br]제34·35대 [[루이나 의회|하원의원]] || ||<height=35> '''기념''' ||번즈 기념재단 {{{-2 (1954년 설립)}}} ||}}}}}}}}} || [목차] [clearfix] == 개요 == > There is no man in this room who believes the law was written for the man who shovels the coal. It was written for the man who owns it, and for fifty years it has been read to us by lamplight, in the yard, after the whistle. > '''이 방에 있는 누구도 그 법이 석탄을 퍼 넣는 사람을 위해 쓰였다고 믿지 않습니다.''' 그것은 석탄을 가진 사람을 위해 쓰였고, 지난 오십 년 동안 우리에게는 [[루이나 철도총지배인협회|기적이 울린 뒤]] 조차장에서 등불에 비춰 읽어 주는 방식으로만 전해졌습니다. > > I fired the night freight out of Port Mason for eight years. A fireman does not see where his train is going. He stands with his back to the road and his face to the fire, and he feeds it in the dark. He knows the grade by the sound of the stack. He knows the morning is coming, not because he can see it, but because the water steadies in the glass and the cold lets go of the cab. > 저는 여덟 해 동안 [[포트메이슨]]발 야간 화물열차의 화부였습니다. 화부는 자기 열차가 어디로 가는지 보지 못합니다. 그는 [[루이나 철도노동자연맹|선로에 등을 지고 불을 마주한 채]] 어둠 속에서 화실에 석탄을 퍼 넣습니다. 그는 굴뚝 소리로 오르막을 압니다. 그는 [[루이나 민주화운동|아침]]이 오고 있음을 압니다. 눈으로 보아서가 아니라, 수면계의 물이 잔잔해지고 운전실에서 냉기가 물러가기 때문입니다. > > That is the whole condition of the working people of this country. We fire the engine and we are not permitted to see the road. But we know the grade by the sound of it, and we know that the night has weight, and weight is the one thing in this world that must come down at last. The lamps along the yard will go from red to green. Not because a court has ordered it. Because morning is the one property no man has yet contrived to own. > 그것이 이 나라 노동자들이 처한 조건의 전부입니다. 우리는 기관을 때면서도 앞길을 볼 권한은 없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소리로 오르막을 알며, [[1978년 군정|밤]]에는 무게가 있다는 것을, 그리고 무게란 결국 내려앉을 수밖에 없는 유일한 것임을 압니다. 조차장의 등은 붉은색에서 초록색으로 바뀔 것입니다. 법원이 명령해서가 아닙니다. '''아침은 아직 누구도 소유하는 데 성공하지 못한 유일한 재산이기 때문입니다.''' > > I am ready for the sentence. > '''저는 선고를 받을 준비가 되었습니다.''' > --- > 1916년 12월 14일, 금지명령 위반 재판의 최후진술. 105년이 지난 2021년 [[루스탈지아 그래이]] 대통령이 취임 연설에서 마지막 문단을 인용하면서 다시 회자되었다. [[루이나]]의 노동운동가, 사회주의자, 정치인. [[루이나 철도노동자연맹]](RRWF)을 창설해 루이나 최초의 산업별 노동조합 운동을 이끌었고, 1916년 [[빈덴브루크 철도 총파업]]을 지휘했다. 파업 실패와 수감을 거치며 사회주의자로 전향해 1918년 [[루이나 사회민주당]]을 창당하고 초대 당수를 지냈다. 그가 만든 조직은 4년 만에 무너졌고, 그가 이끈 파업은 패배했으며, 그가 세운 정당은 그의 생전에 집권하지 못했다. 발의한 법안 가운데 통과된 것도 없다. 그럼에도 번즈는 루이나 노동운동사에서 가장 자주 인용되는 인물로 남아 있다. 직종과 등급으로 갈라진 노동자를 하나로 묶는다는 발상, 국가가 사법부와 군을 동원해 자본의 편에 설 수 있다는 폭로, 그리고 노동자의 이해를 대변하는 독자 정당이라는 구상이 모두 그의 활동을 통해 루이나 사회에 처음 제기되었기 때문이다. 오늘날 노선이 정반대인 [[루이나 노동총동맹]]과 [[루이나 민주노동조합총연맹]]이 나란히 그를 자기 계보의 출발점으로 내세우는 것도 이 때문이다. == 생애 == === 철로에서 자란 소년 === 1869년 3월 4일 [[포트메이슨]] 외곽의 철도 마을 록크로프트에서 태어났다. 아버지 패트릭 번즈는 선로 보수반의 일용 노동자였고, 어머니 엘리자는 하숙을 쳐서 살림을 보탰다. 형제 다섯 가운데 셋이 성인이 되기 전에 죽었다. 훗날 그는 어린 시절의 기억을 "장례식과 기적 소리"라는 두 단어로 요약했다. 열네 살에 학교를 그만두고 빈덴브루크 중앙철도의 조차장 청소부로 일을 시작했다. 열여섯에 화부가 되어 기관실에 올랐고, 이후 여덟 해 동안 포트메이슨발 야간 화물열차를 탔다. 정규 교육은 여기서 끝났지만 독학은 평생 이어졌다. 승무 대기 시간마다 도서관을 드나들었고, 스무 살 무렵에는 지부 회의에서 서기를 맡아 회의록을 정리했다. 이 시기에 몸에 밴 문장력과 기관실의 경험은 훗날 그의 최대 무기가 된다. 그의 연설에 반복해서 등장하는 야간 화물열차, 화실, 신호등의 비유는 모두 이 여덟 해에서 나왔다. === 화부 조합 === 1890년 [[화부 조합]] 포트메이슨 지부 서기로 선출되면서 조합 활동을 시작했다. 1896년 조합 기관지 부편집장, 1904년 사무총장이 되었다. 조합은 상호부조와 사망보험을 중심으로 운영되는 온건한 직종 조직이었고, 번즈도 처음에는 그 방식에 만족했다. 그는 조합비를 성실히 걷고 유족 급여를 제때 지급하는 일에서 보람을 찾았으며, 파업에는 회의적이었다. 생각이 바뀐 것은 사무총장으로서 전국의 사고와 분쟁을 처리하면서였다. 화부가 죽으면 조합이 유족에게 300 USD를 지급했지만, 같은 사고로 죽은 조차장 인부의 유족에게는 아무것도 없었다. 조합원은 파업에서 보호받았지만 조합에 들어올 자격조차 없는 지상직 노동자는 그대로 해고되었다. 1911년 그는 기관지 사설에서 "우리는 우리보다 약한 사람들의 등을 밟고 서 있다"고 썼고, 이 문장 때문에 조합 내 보수파와 정면으로 충돌했다. 1912년 조합 대의원대회에 그는 모든 철도 노동자를 직종 구분 없이 받아들이는 단일 조합 설립안을 제출했다. 안건은 압도적 표차로 부결되었다. 숙련 조합원들은 비숙련 노동자와 같은 조합에 속하는 것이 자신들의 교섭력을 떨어뜨린다고 보았다. 이듬해 초 번즈는 사무총장직을 사임하며 "나는 이 조합을 떠나는 것이 아니라, 이 조합이 들여보내지 않은 사람들에게 간다"는 짧은 성명을 남겼다. === 철도노동자연맹 창설 === 1913년 6월 22일 [[빈덴브루크]] 캐슬베리가의 임대 강당에서 [[루이나 철도노동자연맹]] 창립대회가 열렸다. 참석자 187명 가운데 절반 이상이 어떤 조합에도 속한 적 없는 지상직 노동자였다. 번즈는 초대 위원장으로 선출되었고, 규약 제1조에 "철도의 운행과 유지에 노동을 제공하는 모든 사람"을 조합원으로 규정하는 문구를 직접 써 넣었다. 첫해 조합원은 8,400명에 그쳤다. 상황이 달라진 것은 1914년 4월 오크데일 철도 파업에서 12일 만에 임금 삭감을 철회시키면서였다. 형제단 조합들이 한 번도 해내지 못한 승리였다. 이후 2년간 번즈는 전국을 순회하며 하루 서너 차례씩 연설했다. 그는 연단을 쓰지 않고 화차 위나 조차장 급수탑 아래에 서서 말했고, 청중이 알아듣는 단어만 쓴다는 원칙을 지켰다. 1916년 3월 조합원은 14만 명, 지부는 465개에 이르렀다. 이 시기의 판단 착오도 함께 기록되어야 한다. 1915년 대의원대회에서 조합원 자격을 시민권자로 제한하는 조항이 상정되었을 때, 번즈는 반대 의견을 냈으나 표결을 막으려 하지는 않았다. 여성 조합원 가입을 인정하는 개정안이 통과된 바로 그 대회에서 이민 노동자를 사실상 배제하는 조항이 함께 통과되었고, 이 결정은 이듬해 그대로 대가를 치른다. === 1916년 파업 === 1916년 3월 [[하트웰 궤도차량 주식회사]] 공장에서 [[살쾡이파업]]이 터졌을 때 번즈는 신문 보도를 보고서야 그 사실을 알았다. 그는 처음부터 확전에 신중했다. 제조업체와의 분쟁에 철도망 전체를 거는 것은 승산이 낮고, 폭력 사태가 한 번이라도 벌어지면 정부에 개입 명분을 준다고 보았기 때문이다. 4월 대의원대회에서 [[애나 콜필드]]의 연설 이후 보이콧이 만장일치로 결의되자, 그는 자신의 반대를 접고 지휘를 맡았다. 표결 직후 그가 대의원들에게 한 말은 "여러분이 결정했으니 나는 앞에 서겠습니다. 다만 뒤를 돌아보지 마십시오"였다. 4월 17일 시작된 보이콧에는 나흘 만에 12만 5천 명, 절정기에는 19만 명이 참여했다. 그러나 정부가 전국 30여 개 법원에서 파업 선동 자체를 금지하는 가처분 명령을 받아내고 군경을 투입하면서 판세는 급격히 기울었다. 번즈는 금지명령을 무시하라고 각 지부에 지시하는 동시에 폭력 행사를 금지하는 지침을 반복해 내려보냈다. 두 지시는 현실에서 양립하지 않았다. 4월 말 빈덴브루크에서 11명이 사망하고 [[그레이스턴]]과 각지에서 방화와 탈선이 이어지면서 여론은 등을 돌렸고, 5월 1일 그가 호소한 전국 총파업은 [[루이나 노동총동맹]]의 거부로 무산되었다. === 재판 === 5월 2일 우편물 운송 방해 공모 혐의로 체포된 그는 보석으로 풀려났다가, 5월 12일 금지명령 불복종 혐의로 다시 구속되었다. 이번에는 보석을 거부하고 수감을 택했다. 5월 15일 본부 압수수색으로 지부와 주고받은 전보가 전부 압수되면서 지휘 체계는 완전히 끊겼다. 9월 시작된 공모 재판에서 변호인 에드워드 L. 크로스는 [[루이나 철도총지배인협회]]의 회의록을 증거로 제출해 "공모한 쪽은 철도회사"라고 반격했다. 재판이 검찰에 불리하게 흐르던 중 배심원 한 명이 병으로 이탈하자, 무죄 판결을 예상한 검찰은 10월 5일 공모 혐의를 취하했다. 남은 것은 금지명령 위반 혐의였고, 이 재판은 배심원 없이 판사 단독으로 진행되었다. 12월 14일 번즈는 최후진술에서 야간 화물열차의 화부 비유를 꺼냈다. 방청석의 기자들은 이 진술을 받아 적었고, 이튿날 여러 신문이 전문을 실었다. 판결은 징역 6개월이었다. === 수감과 전향 === 번즈는 브라이어필드 교도소에서 복역했다. 이 6개월이 그의 생애를 갈랐다. 전국의 사회주의자들이 편지와 책을 보냈고, 그는 감방에서 처음으로 체계적인 사회주의 문헌을 읽었다. 훗날 그는 "노동자와 자본가가 같은 법 앞에 서 있다는 믿음을 브라이어필드의 감방에 두고 왔다"고 말했다. 1917년 6월 출소하던 날 빈덴브루크 중앙역에는 10만 명이 넘는 군중이 모였다. 그러나 그가 돌아왔을 때 RRWF는 사실상 없는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조합원은 19,000명 아래로 떨어졌고 지부 대부분이 문을 닫았으며, 남은 간부들은 블랙리스트에 올라 일자리를 구하지 못하고 있었다. 같은 해 9월 30일 열린 최종 대의원대회에서 그는 마지막으로 연설했고, 대회는 해산과 함께 남은 파업기금 전액을 블랙리스트 조합원 구제에 쓰기로 결의했다. === 사회민주당 === 1918년 4월 번즈는 옛 RRWF 지부 간부들과 각지의 사회주의 단체를 모아 [[루이나 사회민주당]]을 창당하고 초대 당수가 되었다. 창당 발기인 312명 가운데 절반 이상이 RRWF 출신이었다. 그의 정치 노선은 처음부터 의회주의였다. 1922년 공산계 활동가들이 별도의 [[적색노동조합평의회]]를 조직하고 당내에서 무장 노선을 주장했을 때, 번즈는 이를 단호히 거부하고 관련 인사들을 배제했다. 이 결정은 당의 합법 공간을 지켜냈다는 평가와 노동운동의 좌파를 스스로 잘라냈다는 비판을 동시에 받는다. 1920년 총선에서 사민당은 하원 4석을 얻어 처음 원내에 진입했으나, 번즈 본인은 빈덴브루크 제2선거구에서 1,200여 표 차로 낙선했다. 1924년 같은 선거구에서 당선되어 처음 의석을 얻었고 1928년 재선했다. 의정 활동은 쟁의 관련 입법, 산업재해 보상, 아동노동 금지에 집중되었다. 그가 대표발의한 17개 법안 가운데 본회의에 상정된 것은 3개, 통과된 것은 없다. === 만년과 죽음 === 1932년 건강 악화로 총선 불출마를 선언하고 당수직에서 물러났다. 대공황기 사민당이 세를 불리는 동안 그는 벨포르 근교에서 요양하며 회고록을 집필했으나 끝내 완성하지 못했다. 1937년 11월 2일 68세로 사망했다. 장례는 빈덴브루크에서 노동조합장으로 치러졌고, 운구 행렬을 따라 걸은 인원이 20만 명으로 추산되었다. 같은 해 결성된 [[전국철도노동조합]]은 창립 규약 전문에 그의 이름을 올렸다. 묘소는 빈덴브루크 로즈힐 묘지에 있으며, 묘비에는 그가 남긴 문장 한 줄만 새겨져 있다. "아침은 누구의 것도 아니다." == 선거 이력 == ||<tablewidth=100%><tablebordercolor=#8C1A1A><width=14%><bgcolor=#8C1A1A> {{{#F2E3C6 '''연도'''}}} ||<width=26%><bgcolor=#8C1A1A> {{{#F2E3C6 '''선거구'''}}} ||<width=22%><bgcolor=#8C1A1A> {{{#F2E3C6 '''정당'''}}} ||<width=16%><bgcolor=#8C1A1A> {{{#F2E3C6 '''득표율'''}}} ||<bgcolor=#8C1A1A> {{{#F2E3C6 '''결과'''}}} || ||1920년 ||빈덴브루크 제2 ||사회민주당 ||31.4% ||낙선 || ||1924년 ||빈덴브루크 제2 ||사회민주당 ||42.9% ||당선 || ||1928년 ||빈덴브루크 제2 ||사회민주당 ||46.2% ||당선 || == 사상 == 번즈의 사상은 세 단계로 나뉜다. 화부 조합 시기에는 직종 조합의 상호부조를 신뢰했고, RRWF 시기에는 산업별 조직과 동조 행동을 통한 단체교섭에 집중했으며, 수감 이후에는 생산수단의 사회적 소유와 독자 정당을 주장했다. 일관된 것은 두 가지다. 첫째, 노동자의 해방은 노동자 자신의 조직에서 나와야 하며 외부의 시혜로 주어지지 않는다. 그는 지도자를 자처한 적이 없고, 연설에서 자신을 "먼저 소리를 들은 사람"이라고 표현했다. 둘째, 폭력은 어떤 경우에도 노동운동의 수단이 될 수 없다. 그는 파업 기간 내내 재산 파괴를 금지했고 그레이스턴 방화 사건 이후 지부에 강한 경고를 내렸으나, 지부의 자발적 행동을 실제로 통제하지는 못했다. 말년의 회고록 초고에서 그는 RRWF의 가장 큰 실책으로 이민 노동자 배제를 꼽았다. 조합이 문을 닫아걸었기 때문에 그 문 앞에 선 사람들이 대체 노동자로 투입되었고, 그것이 패배의 절반이었다는 것이다. == 평가 == 당대의 평가는 극단으로 갈렸다. 친기업 언론은 그를 "폭동의 왕", "루이나를 인질로 잡은 사내"로 불렀고, [[조지 에스턴]] 총리는 의회 연설에서 그를 국가 권위에 대한 반란의 선동자로 규정했다. 반면 파업에 참여한 노동자들에게 그는 처음으로 자신들의 언어로 말한 사람이었다. 후대의 평가는 대체로 세 갈래다. 첫째, 조직가로서의 번즈는 3년 만에 14만 명을 조직한 탁월한 인물이었으나 조직을 통제할 제도를 만들지 못했다는 것. 둘째, 전략가로서는 승산 없는 확전을 막지 못했다는 것. 셋째, 그럼에도 그가 제기한 문제들이 이후 반세기 동안 루이나 노동입법의 의제를 결정했다는 것이다. 그에 대한 평가가 가장 첨예하게 갈리는 지점은 1922년의 공산계 배제다. 이 결정으로 사민당은 합법 정당으로 살아남았고 [[루이나]]가 이후 공산주의 단체를 전면 금지한 뒤에도 노동 좌파의 의회 통로가 유지되었으나, 동시에 노동운동의 급진파는 지하로 밀려났다. == 어록 == > ''우리는 우리보다 약한 사람들의 등을 밟고 서 있습니다. 그 위에서 아무리 오래 버텨 봐야 그것은 서 있는 것이 아닙니다.'' > --- > 1911년, 화부 조합 기관지 사설 > ''나는 이 조합을 떠나는 것이 아니라, 이 조합이 들여보내지 않은 사람들에게 갑니다.'' > --- > 1913년 1월, 화부 조합 사무총장 사임 성명 > ''열차를 움직이고 모두를 끌어내려면 금지명령 이상의 것이 필요할 것입니다. 우리는 모든 곳에서 전진하고 있습니다.'' > --- > 1916년 4월 25일, 각 지부에 보낸 전보 > ''강한 사람과 넓은 마음만이 금권정치와 오만한 독점에 저항할 수 있습니다. 군대, 금지명령, 어용 언론에 겁먹지 마십시오. 파업을 지속하고 확고한 자세를 유지하십시오. 폭력을 행사하지 마십시오.'' > --- > 1916년 4월 27일, 조합원에게 보낸 호소문 > ''저들은 제게 여섯 달을 주었습니다. 저는 그 값으로 이 나라가 누구 편인지를 알아냈으니, 손해 본 거래는 아닙니다.'' > --- > 1917년 6월, 출소 직후 빈덴브루크 중앙역 연설 > ''우리는 문을 닫아걸고 싸웠습니다. 그리고 그 문 앞에 서 있던 사람들이 우리 자리를 대신했습니다. 진 것은 군대 때문이 아니라 그 문 때문이었습니다.'' > --- > 1934년, 회고록 초고 == 기타 == * 신문들은 1916년 파업 당시 그를 "폭동의 왕", "독재자"로 불렀다. 반면 노동자들 사이에서는 순회 연설의 인상 때문에 "철로 위의 설교자"로 통했다. * RRWF 기관지 《철도노동자》의 사설은 창간부터 폐간까지 대부분 그가 직접 썼다. 이 사설들을 묶은 선집이 1952년 처음 출간되었다. * 회고록은 미완으로 남았고, 남동생 아서 번즈가 유고를 정리해 1941년 《선로 위에서》라는 제목으로 펴냈다. * 1954년 설립된 번즈 기념재단이 유고와 서신 2만여 점을 소장하고 있으며, 빈덴브루크 캐슬베리가 노동회관 1층에 기념 전시실을 운영한다. * [[루이나 민주노동조합총연맹]]은 매년 창립기념일에 그의 묘소를 참배한다. [[루이나 노동총동맹]] 산하 [[전국철도노동조합]]도 같은 계보를 표방해, 두 총연맹이 같은 인물을 두고 경쟁하는 구도가 이어지고 있다. * 그가 복역한 브라이어필드 교도소는 1978년 폐쇄되었고, 수감동 일부가 보존되어 전시 공간으로 쓰인다. * 1989년 [[루이나 교직원노동조합]] 창립대회에서 초대 위원장이 인용한 문구도 그의 출소 연설이었다. * 2021년 [[루스탈지아 그래이]] 대통령이 취임 연설에서 최후진술의 마지막 문단을 인용하면서 그의 이름이 다시 대중적으로 알려졌다. 이후 최후진술 전문이 여러 차례 단행본으로 재출간되었다.
Liberty
|
the seed